보스턴에서 실리콘밸리로 이사 온 지 두 달이 지났다. 비록 같은 나라 안이긴 하지만 동부에서 서부로 옮긴다는 것은 마치 다른 나라로 이주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전에 살던 보스턴의 교외지역은 백인이 주류인 유서깊은 곳이었다. 중국인, 인도인 등 아시안 인구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백인이 90% 가까운 인구를 점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백인들 사이에 끼여 소수자로 사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 지역의 중심에 있는, 우리 가족이 자리잡은 쿠퍼티노는 그 반대다. 이곳은 아시안이 주인인 곳이다. 인도계와 중국계가 점령한 쿠퍼티노에선 백인들을 보기가 힘들다. 우리 애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중학교에는 한 반에 백인 학생이 1~2명밖에 없을 정도다. 그들마저 인도·중국계 엄마들의 치맛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얼마 전 지인의 초대로 그분이 다니는 반도체회사의 야유회에 간 일이 있다. 행사에 온 직원들 대부분이 아시안 등 비백인이었다. 백인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보일 정도였다. 말레이시아계 화교가 창업한 회사라서 그런지 더더욱 아시안이 많고 백인은 마케팅이나 재무 부서에 좀 있는 정도라는 설명을 들었다. 전세계에 직원이 수천명인 수조원 가치의 회사가 그렇다.
집 근처에는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일본·인도·중국·아랍식 식료품 슈퍼가 있고, 차로 5분 거리에 한국 슈퍼가 있다. 각 민족의 인기식당에 갈 때면 중국, 인도, 일본 등에 가 있는 느낌이 난다.
쿠퍼티노는 애플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 스티브 잡스가 쿠퍼티노의 홈스테드고교를 졸업하던 72년에는 거의 100% 백인만이 살던 동네였다. 잡스와 애플의 고향이 이렇게 아시안들에게 점령이 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인텔, 에이치피(HP), 시스코시스템스 등 글로벌 아이티(IT) 기업과 구글·페이스북 등 새로운 인터넷 강자들의 보금자리인 실리콘밸리는 미국 경제의 희망이다.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그런 이곳이 아시안의 힘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기 위해 유입된 히스패닉 이민과 달리 대개 석·박사급의 고급인력인 아시안들은 이곳 기업들의 연구개발 분야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곳에서는 백인 엔지니어를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다.
유시(UC)버클리의 교수인 비벡 와드와의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 중 이민자가 창업한 비율은 52%에 달한다. 실리콘밸리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혁신의 힘이 이민자에게서 나온다는 증거다.
실리콘밸리의 혁신 비결을 열대우림의 생태시스템에 비유해 분석해낸 ‘레인포레스트’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벤처캐피털리스트 빅터 황은 ‘왜 실리콘밸리는 계속해서 혁신을 이어나가는데 다른 지역은 그렇지 못한가?’라는 질문에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는 열대우림의 다양한 잡초에서 억센 생명력이 나오는 것처럼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교류가 일어나면서 가장 큰 경제적 효과가 나온다고 설명한다. 또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피부색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관습과 문화를 뛰어넘어 열린 마음으로 서로 신뢰하고 일하는 곳이 실리콘밸리라고 한다. 이종 간의 협업과 실험을 통해 기발한 혁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에 와서 살면서 이 지역의 다양성과 외부인에 대한 포용력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다문화에 대한 이런 관용과 포용력이 없이는 인재 부족으로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참, 항상 청명하고 쾌적한, 축복받은 날씨가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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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2년 9월4일자로 기고했던 [임정욱의 생각의 단편]칼럼. 기록을 위해서 블로그에 다시 옮긴다.
처음 쿠퍼티노에 가서 예상과 달리 도서관, 상점 등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대부분 중국, 인도인이라는 것을 보고 “이곳이 애플의 본사가 있는 곳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평일에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백인들은 자세히보면 애플직원이고 실제 주민들은 대부분 아시안이다. 학교에 가서 애들 학부모들과 이야기해보면 거의 획일화되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거의 대부분 IT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다들 어딘가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사람들이다. 사실 쿠퍼티노뿐만이 아니고 실리콘밸리 전체가 이렇게 변모해가고 있다. 내가 버클리에 다니던 10년전보다도 휠씬 많이 늘어난 느낌이다.
이처럼 이방인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이 실리콘밸리다. 이방인들이, 특히 각국의 인재들이 와서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이 실리콘밸리의 으뜸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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