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영역과 공적 영역의 ‘소셜게임’ (Social play between private and public space)

<관련 포스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나’의 정체성>

우리 안에는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나’가 공존한다. 사회적으로 참여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나’와 은밀한 개인 공간에서 아늑한 생활을 하고 싶은 사적인 ‘나’이다. 일과 가정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한 쪽이 부족하면 결핍을 느낀다. 이 균형이 성립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다. 두 영역은 계속 진화해왔지만 지금 소셜미디어에서는 그 변화가 매우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두 영역의 특성과 변화를 살펴본 후 새로운 현상을 어떻게 읽고 대응해야 할지 ‘사용자 정체성’ 관점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두 공간의 분리(separation)에 기반한 기존의 질서

소셜미디어가 공적영역이냐 사적영역이냐는 논쟁은 소모적이다. 아래의 정의에 따르자면 소셜미디어는 당연히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포괄하는 공간이고 노드이다. 지금 문제는 공사의 경계가 어디인지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둘의 경계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대신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공생(symbiosis)’한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 공생의 방식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결핍이 아니라 균형으로 가기 위한 답을 얻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정확한 정의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1. 사적영역은 ‘아래’에 있는 분리된 공간이었다

두 공간의 개념을 이 짧은 포스트에서 정리하는 것은 당연히 무모하다. 하지만 엠마누엘 칸트,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머스, 얼빙 고프만, 앙드레 아쿤, 리처드 세네트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몇줄 요약을 시도하도록 하겠다. (긴 텍스트에 대한 독자들의 용서도 빈다.)

사적 공간은 우선 라틴어 ‘privatus‘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으로부터의 단절(separation)’ 또는 분리(isolation)를 전제로 한다. 사적 공간이 존재하기(성립되기) 위해서는 공적 공간으로부터의 분리가 필요하다. 가정(oikos/familiy) 생활은 ‘폴리스(polis)’라는 공적 무대의 활동과 분리되었다. 사적 공간은 공적 공간보다 아래에 있었다. 공인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궁핍 등 사적 공간에 문제가 없었어야 했다[Hanna Arendt, The human condition , 1958]. 우리말로 가화만사성이다. 하지만 지금 사적 공간의 분리란 외부로부터 단절될 수 있는 ‘권리’로 해석된다. 직장에서 돌아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웃고 휴식하는 시간은 업무로부터의 단절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타인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나의 ‘익명성(anonymity)’과 삶의 ‘사유화(privatisation)’가 허락된다.

익명성은 프라이버시와 연결된다. 개인적인 정보와 삶을 보호받고 외부에 노출되지 않을 때 사적인 공간에서의 심리적인 안정이 이뤄진다. 이웃이 내 집에 무단침입할 수도 없지만 힐끔거리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서로의 암묵적인 약속이다. 최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프라이버시 이슈가 커지는 이유는 이와 같은 사적 공간을 더 이상 보장받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등 여러 종류의 사적인 네트워크들이 페이스북이라는 하나의 네트워크를 공유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그 중 하나이다. 개인의 정보가 상업적 용도로 쓰이면서 생기는 문제점도 있다. 히스토리가 쌓여 정체성이 점차 드러나고 사적 네트워크간의 접목과 융합이 확대됨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개인이 재산을 축적하는 것도 사적 영역의 일이다. 다만, 과거에는 생계를 위한 노동이 사적공간에 국한되고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면 지금은 반대다. 부와 권력을 영위하기 위해 사람들은 밤샘 야근을 하고 주말을 반납한다. 노동이 사적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기반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지적한다. 사유재산의 증식이 ‘자본’이 되고 이 자본이 개인의 소유를 넘어섬에 따라 많은 질서가 다시 세워진다. 경제국가 건설이 정부의 미션이 된다.

사적 공간에서 생산된 가치가 공적공간으로 넘나들면서 공사의 경계는 흐려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도시(urban)’의 출현과 ‘가시성(visibility)‘의 개념이 추가되면서 공적 영역에 대한 이해도 진화하게 된다. 지금 오가닉 미디어에서 감지되는 사회적 현상들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음을 아래 이어지는 내용에서 알게 될 것이다.

 

2. 공적 영역은 정치적, 사회적, 가시적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공적 공간의 개념적 진화는 크게 3가지 관점을 통해 이뤄져 왔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는 정치적 공간(scène politique)이다. 정치인들이 활동하는 무대뿐만 아니라 여론과 참여, 사회적 인정이 일어나는 무대를 통칭한다고 하겠다. 국회만큼 제도화된 공간이든 아니든 토론과 합의를 통해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공론의 장’이기도 하다[Habermas,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1962]. 여기서 우리의 정체성은 ‘시민(citizen)’이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공간에서는 도처가 공론의 장이다. 다음 아고라, 개인 블로그, SNS 등 저마다 규칙과 제도를 기반으로 참여할 수 있다. 다만 전통적 개념의 공론의 장보다 훨씬 파편화되고 다양해졌으며 (관료적 방식이 아닌) 유기적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두번째는 사회화(socialisation)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학교, 직장, 교회 등 타인과 내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는 공간이다. 서로가 서로를 하나의 ‘주체(subject)’로 인정하고 관계 안에서 정체성을 찾아간다. 규범과 규칙을 통해 구성원들이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습득한다. 여기서 우리의 정체성은 ‘구성원(social components)’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RPG 게임 등 사용자 참여를 기반으로 유지되는 모든 서비스는 사회화의 공간이다.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고 인정받고 싶은 심리적 욕구가 있다. 공동체의 목표에 동참함으로써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 마라톤에서 각자가 경주를 하지만 집단적인 참여 과정에서 암묵적인 규범과 규칙을 따른다. 참여가 곧 존재가 된다. 여행지에서 호텔을 이용하지 않고 개인의 아파트를 빌리는 것, 물건을 새로 사지 않고 있는 물건을 함께 나눠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유 서비스의 이용동기에는 가격이 싸다는 것도 있지만 ‘착한’ 경제 활동에 기여하면서 자존감도 키운다. 이러한 사례들은 사적인 ‘나’가 아니라 공적인 ‘나’가 활동하는 과정이다. 공적인 나를 향한 본능적 욕구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 다듬어지고 진화된다.

세번째는 공적인 장소(scène publique), 즉 무대이다. 도시공간, 카페, 광장, 공원 등 가시적으로 내가 ‘노출되고’ 드러나는 물리적인 공간을 말한다 [Richard Sennett, The fall of public man, 1977]. 서로가 공적 장소에서 서로의 익명성을 존중해준다. 익명성은 더 이상 사적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공적 공간의 개념적 진화가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Rainy Day, 1877]. 파리의 쌩라자르역(Saint-Lazare)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19세기 말의 패션과 도시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도시의 출현과 카페, 기차역, 공연장 등은 공적영역의 개념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Rainy Day, 1877]. 파리의 쌩라자르역(Saint-Lazare)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19세기 말의 패션과 도시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도시의 출현과 카페, 기차역, 공연장 등은 공적영역의 개념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존의 공적 영역이 다분히 ‘전체주의’, ‘민주주의’ 등의 관점에서 출발했다면 여기서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인간의 감정, 타인의 시선과 암묵적 커뮤니케이션이 주가 된다.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외모나 스타일, 행동들은 모두 무대의 한 장면이다 [Guy Debord, La société du spectacle, 1967].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는 공간이며 눈빛과 몸짓으로 직간접적인 상호작용이 이뤄진다[Erving Goffman, Interaction ritual: essays in face-to-face behavior, 1967, ]. 여기서 서로의 정체성은 ‘관중(audience)’이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공적 무대에서의 상호작용은 디지털 족적(footprint)이 남는 ‘모든’ 곳에서 시작된다고 하겠다.
우리가 사적 공간으로 알고 있는 개인의 홈페이지는 공적 영역의 3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사적인 공간임과 동시에 모두에게 노출된 공적인 무대이다(그렇지 않으면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올릴 때 망설일 이유가 없다). 사회화도 일어난다. 아무리 개인 공간이라도 서로 공존하기 위해 지켜야할 에티켓이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서로를 배우고 함께 성장한다. 공적인 이슈에도 반응하고 참여하며 제도적 공간의 역할도 수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홈페이지는 사적, 공적 공간이 공존하는 융합된 노드이며 사람들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공간이자 관계를 매개하는 매개체라고 하겠다.

 

3. 두 공간의 경계는 상대적이다

공적, 사적 영역의 정확한 경계를 구하는 것은 어렵다. 스타벅스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테이블은 사적인 공간인가, 공적인 공간인가? 여기서 타인으로부터의 ‘단절’과 ‘익명성’ 그리고 ‘사생활’은 어디까지 보장 받고 요구할 수 있을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고 있는 지금 여기는 사적인 영역의 모자이크이며, 그 스토리들의 합이 카페라는 공적 공간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두 공간의 융합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집이라는 사적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회사에서 돌아온 내 집은 사적인 공간이지만, 이 공간에서 거실은 다시 가족들의 공적 공간이고 서재는 나만의 공간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사적 공간을 침범하고 보장해주지 않으면 갈등이 일어난다. 사생활에서도 서로 예의가 필요하다. 아이들이라고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두 공간의 경계는 개념적으로 한번 그어지면 영원히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한 삶의 국면속에서 유연하게 구분되는 본질을 갖고 있다.

확실한 것은 두 영역은 서로 분리될때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공적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야 사적 생활이 가능하다. 사적 이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만 공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두 공간의 관계는 변해왔고 이제는 높낮음이 아니라 ‘공생’ 관계로 바뀌고 있다. 특히 소셜 미디어에 들어서서는 이들의 융합과 공생이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시성(visibility)’의 역할이 극대화되고 소셜미디어라는 무대와 결합하면서 폭발하게 된 것이다.

 

두 공간의 공생(symbiosis)이 만드는 새로운 질서

예전에는 집을 떠나는 것이 영웅이 되기 위한 조건이었고 상징이었다. 이제는 ‘무책임한’ 가장이다. 돈키호테도 영웅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공적인 영역에서 존재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적인 영역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사람의 업적이나 사회적 소속만큼 중요해진 것이 그 사람의 취향이고 가족이고 일상 생활이다. ‘일상(everyday life)‘의 파편들의 합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두 영역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상은 언제나 미디어에서 먼저 발견되고 극대화된다.

 

[Miguel de Cervantes, L’Ingénieux Hidalgo Don Quichotte de la Manche, 1605(Volume I),
[Miguel de Cervantes, L’Ingénieux Hidalgo Don Quichotte de la Manche, 1605(Volume I),
1615(Volume II)]. 돈키호테는 영웅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과거 소설의 stereotype에서 출발한다. 처음에는 중세의 가치를 따르지만 길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주인공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다.
1. 더 이상 ‘단절’이 영웅을 만들지 않는다

기존의 출판 개념은 대표적인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었다. 한 권의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사적 공간에서의 습작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스토리가 ‘완성’되었을 때 출판 과정을 거쳐 ‘공식적으로’ 공적 공간으로 내보내졌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하고 공적인 공간에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기까지 그가 사적 공간에서 보낸 세월이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마지막에 공적 공간에 ‘대작’을 남기고 죽는 프로세스가 아니라, 수시로 다양한 방식으로 공적 공간에서 회자되고 넘나들 수 있다. 새로운 출판의 프로세스이다. 콘텐츠도 진화하고 컨테이너도 진화하는 오가닉 미디어 공간에서는 콘텐츠가 씨앗으로 생성되면 그 이후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공적 영역에 한번 나가면 끝이 아니라 영역을 넘나들면서(le va-et-vient) 지속적으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2. 공적 공간은 사적 스토리가 지배한다

공적인 담론과 사적인 스토리도 더 이상 대립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공인에게서 숨겨진 스토리를 찾고 기업의 스토리에서도 공감과 동일시(identification)를 찾는다. TV에서 주인공은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과 같은 공인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못생기고 평범한 옆집 아저씨 캐릭터를 TV 프로그램에서 만나게 된다. ‘리얼리티’와 ‘서바이벌’ 등의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일반인들을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일반인들의 사적 공간에서 발생하는 사생활이 TV 프로그램이라는 공적 공간을 통해 전달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배우보다 일반인들의 스토리에 동일시가 훨씬 쉬워졌기 때문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수 지망생들은 노래만 부르지 않는다. 그들의 사적인 사연들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고 가슴을 울리고 프로그램을 더 드라마틱하게 이끄는 요소로 작용한다. 정치인들이 힐링캠프에 출연하고 미니홈피를 통해 사적인 스토리를 전하는 것도 같은 양상이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대신 이 두 영역이 공생관계로 진화함에 따라 ‘감출수록 드러나고 보일수록 가려지는’ 소셜 게임이 시작되었다.

 

3. ‘감출수록 드러나고 보일수록 가려지는’ 소셜 게임

기업이든 개인이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게임의 룰은 모두에게 적용된다. 프랑스 국정원이 최근 위키피디아에서 당한 망신은 공사영역의 공생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감출수록 모든게 드러나는 악몽을 겪었다. 더구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에서는 공사 콘텐츠의 공생관계가 일상적이다. 사적 이야기와 공적 이야기가 구분될 공간이 따로 없다. 이 때 공간을 규정하는 규칙은 사람들간의 인터렉션 속에서 체험적으로 만들어진다. 오가닉 미디어에서의 규칙은 공부해서 알 수가 없고 체험을 통해서만 학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산경찰청의 페이스북 페이지의 팬 수는 4만4천명이 넘는다. 공적 스토리가 사적 스토리가 ‘공감’이라는 코드를 매개로 넘나든다.
부산경찰청의 페이스북 페이지의 팬 수는 4만4천명이 넘는다. 공적 스토리가 사적 스토리가 ‘공감’이라는 코드를 매개로 넘나든다.

 

그래서 개인과 조직들은 체득을 통해 공생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타임라인에 게재되는 맛집 사진과 신문기사는 나란히 올라온다. 기업들도 구성원들의 야유회 사진을 공유하고 경찰청 페이스북은 오늘 있었던 에피소드를 시민들에게 재미나게 들려준다. 기관과 기업들이 사적인 부분을 감추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일반 사용자들과 같이 울고 웃고 대화하는 친구와 같은 노드로 포지셔닝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연예인들에게 파파라찌는 필요악이 되었다. 사생활을 침범하는 성가신 존재지만 파파라찌 덕택에(?) 공적 공간에 게재되는 사생활은 그들의 인기를 확인하고 더 관심을 끌게 하는 콘텐츠로 탄생한다. 감출수록 드러나고 더 보고싶어진다. 홈페이지에서는 개인화와 사회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헤어진 연인들에게 미니홈피는 서로를 훔쳐보고 집착하는 강렬한 마약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카카오톡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드러내고 감시하고 숨기면서 소셜 게임을 벌이고 있다. ‘보여지는 것’에 기반한 정체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

문제는 ‘가시(visible)’가 극단적으로 흐르면 ‘과시/가식’이 되고 정체성은 요원해진다. 사람들은 감출수록 보고싶어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보일수록 가려지고 멀어지는 것이 정체성이다. 토론과 참여, 여론이 만드는 공적활동이 이미지와 평판(reputation)으로 채워지면서 사회는 집단적 힘을 잃는다. ‘감출수록 드러나고 보일수록 가려지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다.

 

4. 사적 공간 위에 공적 공간을 세우다

소셜 미디어에서 ‘공적인 나’의 정체성은 이제 사적인 구조물(edifice)에 기반하고 있다. 공적인 장소처럼 꾸미고 공적인 모습에 집중하던 ‘공식홈페이지’ 는 낡은 것이 되었다. CEO의 인사말로 시작하는 공식 홈페이지가 아니라 고객에게 사유 공간을 열어주고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용자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먼저가 되었다. 기업의 공적인 정체성은 이제 ‘개방(openness)’에서 출발한다.

그럼 반대로 사적 공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환상은 버리는 것이 좋겠다. 소셜미디어에서 사적 공간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은 노출 수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 말고는 불가능하다(구글 플러스에서 여러 종류의 네트워크를 관리할 수 있지만 사용자의 노동과 관리가 필요하므로 페이스북의 대체제가 되지 못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내 페이지는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로 사적 공간이 될 수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두 영역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홈페이지를 ‘사적 공간’으로 충분히 명명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 역할에 있다.

사적 영역은 이제 공적 영역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infrastructure)가 되었다. 이에 따라 나를 드러내고 정의하는 방법도 더 이상 사회적 참여와 공적인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 취향과 일상 등 훨씬 더 감성적이고 개인적 영역이 융합되어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된다.

 

5.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는 ‘나’

하지만 공적인 무대에서의 가시성은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콘텐츠가 공유되고 유통되면서 노드와 링크가 생성되고 유지되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한다. 이 과정을 잘못 이해한 기업전략은 낭패를 보기도 한다. 유기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소셜미디어에서는 영역간의 경계 대신 ‘매개‘를 통해 ‘어디에나’ 존재하는 ‘가시성(visibility)’이 만들어진다.

즉 오가닉 미디어에서 공적 영역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활동과 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 있지만 도처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오가닉 미디어에서 ‘공적인 나’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고갈되지 않는 이야기와 ‘공유될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콘텐츠는 범람하고 사생활은 노출되고 익명성은 보장되지 못할 것이다. “무엇이 공유될만한 가치인가?” 각자의 판단이 공적 영역을 만든다. 그 판단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균형을 찾아올 수도 있고 편식과 치우침으로 사회적 파편만을 남길 수도 있다. 뚫어야할 화두이다. 반대로 우리는 도처의 공적 장소에서 기꺼이 벌거벗겨짐으로써 가시성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 한다. 공적 공간을 최대한 확장하면서도 사적 공간을 보장받을 방법이 있을까? “도처에 있으며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이 두가지 질문이 이 시대에 우리 정체성의 균형을 찾아줄 명제이다.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이 명확하던 시대에는 이중적 정체성이 나를 형성했다. 기업의 겉과 속이 다르면서도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모하는 나의 ‘다면적’ 모습의 연결이 나를 규정한다. 이 다면성은 미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과정’속에서 지속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변모한다. 우리는, 조직은, 유기체이며 오가닉 미디어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글 : 오가닉 미디어랩
출처 : http://goo.gl/8Nr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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