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마우스의 발명자이자 HCI(Human-Computer Interaction)의 사실 상의 아버지, 모든 데모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더글라스 엥겔바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비록 세상에는 스티브 잡스의 죽음처럼 떠들썩하게 알려지지는 않겠지만, 그의 유산과 업적은 스티브 잡스를 능가하는 것이기에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연재에서 순서와는 좀 다르지만 오늘은 더글러스 엥겔바트를 소개할까 한다.
더글러스 엥겔바트는 1925년 오레곤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포틀랜드의 시골지역에서 자란 그는 대학도 오레곤주립대학에 들어가는데, 곧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미국 해군에 입대해서 2년간 필리핀 전선에서 레이더 기술자로 복무를 하였다. 군대에 있는 동안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된 글을 하나 읽게 되는데, 그것이 베니바르 부시의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As We May Think)” 이다. 그는 메멕스라는 개념을 퍼뜨린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에서는 하이퍼텍스트와 컴퓨터 네트워크의 출현을 예견하였다. 베니바르 부시에 대해서는 이 연재에서 따로 한 번 다룬 바 있으므로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연관글을 참고하면 된다. 결국 엥겔바트는 베니바르 부시가 예견한 세상을 실제로 구현하는데 일생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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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오레곤주립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1948년 전자공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는데, 이후 냉전시대 서부의 부상을 이끈 나사의 에이미스 연구센터의 전신인 NACA(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 연구실에서 1951년까지 일을 했다. 그는 사람들의 집단지성을 모아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인류의 생활을 발전시킬 것으로 보고 그와 관련한 기술개발에 매진한다. 특히 레이다 기술자로 일하면서 컴퓨터가 분석한 데이터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기에, 인간과 컴퓨터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의 의중을 잘 표현하고 소통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들을 네트워크로 엮을 것인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민했고, 이것이 결국 그가 평생을 바친 연구분야가 되었다. 이런 연구를 위해서 NACA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UC버클리에서 전자공학을 더 공부해서 195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버클리에서 했던 연구는 캘리포니아 디지털 컴퓨터 프로젝트(California Digital Computer project, CALDIC)을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엥겔바트는 몇몇 특허를 내게 된다.
1957년 부터는 스탠포드 리서치 연구소(Stanford Research Institute, SRI)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많은 특허를 내면서 컴퓨터의 역사를 바꾸기 시작한다. 1962년에는 자신의 연구내용을 바탕으로 인간지능증강(Augmenting Human Intellect)에 대한 개념적 프레임워크를 설계하고, 이 프로젝트에 대해 ARPA의 연구자금을 받아서 자신의 리서치 센터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ARC(Augmentation Research Center)이다. 이 연구센터에서 탄생한 것이 마우스, 하이퍼텍스트, 비트맵 스크린, 협업도구, 최초의 GUI 인터페이스 등이다. 그의 연구성과는 대형컴퓨터 시대에 만들어졌기에 당시에는 지나치게 미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1970년대 이후 PC의 시대가 열리고도 한참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야 매킨토시와 윈도우를 통해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마우스의 경우 1967년에 특허를 출원했는데, SRI가 해당 특허에 대한 가치를 거의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마우스 특허는 그 가치를 알아본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사들이게 되는데, 이를 위해 지불한 비용은 4만 달러에 불과했다.
마우스와 함께 엥겔바트 최대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1968년에 있었다. 그는 이 연재에서도 자주 언급한 스튜어트 브랜드와 제록스 파크 연구소와 역사적인 이벤트를 계획하게 되는데, 컴퓨터와 대화를 주고받거나 컴퓨터를 이용해서 여러 사람이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으로 개인이 컴퓨터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멀티미디어를 이용해서 원격으로 데모를 하였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엥겔바트가 연출한 이 데모는 미디어를 이용한 현대식 프리젠테이션의 시초가 되었다. 엥겔바트는 청중 앞에 거대한 스크린을 설치하고 컴퓨터로 정보를 투사시켜 발표하는 방식을 처음 선보였는데, 스튜어트 브랜드는 이 데모를 총지휘하였다. 스튜어트 브랜드는 대항문화의 중심인물이었던 작가인 켄 키지와 함께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하여 LSD 페스티벌을 기획한 경험을 엥겔바트의 데모에 십분 발휘하였다. 이 역사적인 데모영상은 아래에 임베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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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터넷의 전신인 ARPANET의 탄생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그의 말년의 연구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너무 먼 미래를 보았기 떄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협업과 네트워크, 시분할 컴퓨팅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그러나 PC의 물결이 불면서 그의 젊은 제자들은 그와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 의견충돌도 많았고, 결국 대세가 되어 버린 PC 중심의 연구와 상업화된 기업들에 의해서 점점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미래의 모습은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클라우드의 시대가 오면서 실체화되고 있다. 50년 전에 그가 꾸었던 꿈이 예언과도 같이 현재에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진정한 미래학자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허황된 미래의 모습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미래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인 기술들을 만드는데 인생을 바쳤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개념과 기술의 유산을 이용해서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오늘 세상을 등진 컴퓨터와 인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세상을 위해 인생을 바쳤던 위인, 더글러스 엥겔바트의 명복을 빌면서 … 이 글을 바친다.
참고자료: Douglas Engelbart,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글 : 정지훈
출처 : http://goo.gl/ZBm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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