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매력
한 번은 후배가 말하기를 “선배는 독특한 어휘를 잘 쓰시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누군가 선택이 필요한 질문을 하면 내가 ‘난 취향이 없어’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취향이 없는데 독특하다니… 내 입장에선 취향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한 건데 그것이 독특했다면 나는 “음, 난 독특한 어휘를 부러 골라 쓰는 취향은 없어”라고 말해주겠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이 ‘독특하다’는 것은 대개는 ‘뚜렷하다’와 동의어이다. 획일화된 교육과 문화의 세례 속에서 뚜렷한 취향을 갖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일정한 취향이나 노선을 뚜렷하게 유지하는 사람은 흔히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직장생활에서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견해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와 사회적 제문제들은 그 구조상 근본적으로 대결, 배분, 대립과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화제 삼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갈등과 마찰을 낳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장생활 속에서 누군가가 독특한 취향을 가졌다는 것은 대개 문화적으로 일정한 좋음과 싫음을 뚜렷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 후배가 있었다. 나는 입사초년생이었고 이 후배는 이른바 내 ‘부사수’로 들어와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남중과 남고를 졸업해서 남자선배들과 자취를 하고 남자들이 득시글한 군대에서 2년을 보낸 후 입사하여 여전히 남자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울지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문화적인 취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의식주에 있어서 헐벗고 굶주리지 않는 것 외에 다른 지향점이 없었다. 그런 나의 취향없음은 종종 작은 소동이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는데 일행이 호프집에서 하이트를 마시고 있는데 다음 술을 오비라거로 시킨다든가, 팀장이 맘 먹고 데려간 고급 스시집에서 초고추장을 찾을 때는 죄를 지은 마냥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여튼 다시 그 후배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에게 느낀 처음의 특이한 점은 독특한 향을 풍긴다는 것이었다. 나야 면도하고 바르는 맨담 스킨 외에 화장품이라는 것은 써본 적이 없었고 그 외의 다른 무언가가 남자의 피부에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지나갈 때면 아주 쿨하면서도 럭셔리한 향이 주변을 감도는 것이었다. 처음엔 ‘남자새끼가 무슨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차차 익숙해지자 그게 또 상당히 근사하지 뭔가. 나는 몇 번이나 그 향이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면서 물어본단 말인가. 그래서 계속 참고 있는 중이었는데 어느 날 대외협력팀의 미스 정(그 당시에는 ‘미스’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이 ‘00씨 향수 뭐 써? 남자 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물어보자 후배는 씨익 웃으면서 ‘향수에 남자, 여자 게 따로 있나요, 뭐. 저 나인틴 써요.’ 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뚜렷한 문화적 취향을 가진 후배를 통해 이른바 내가 ‘문화’라 부를 만한 어떤 영역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나인틴이 무엇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배는 머리에 겐죠 향수를 뿌리고 바지 주머니에는 샤넬 no.19을 뿌린다고 했다. 정수리 쪽에 향수를 뿌리는 것은 업무 협조를 하러 자신이 앉아 있는 책상으로 오는 사람에게 좋은 향을 직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손목이나 겨드랑이에 향수를 뿌리면 향이 너무 강하기도 하고 오후쯤이 되면 날아가서 없어지기 때문에 바지 주머니에 뿌려놓는다고 했다. 그러면 향도 천천히, 은은히 올라오고 또 필요하면 손을 넣어서 향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철두철미한 향수 운용시스템이란 말인가. 어쨌든 그렇게 취향 하나를 고수할 때도 여러 가지 고려요소와 개성이 담겨있었다.)
나는 당시 처음 받은 월급으로 소니 워크맨을 사서 출퇴근할 때 뿌듯한 마음으로 김광석과 이문세 베스트 앨범류를 듣고 있었다. 가요 외에는 별다른 음악적 소양이 없었던 나에게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신세계였다. 그가 빌려준 카세트 테잎으로 처음 들었던 카디건스, 자미로콰이, 마일스 데이비스, 스탄 게츠는 아직도 나의 베스트다. 거기엔 U2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니그마에 이르는 방대한 음악적 지식도 포함되었다.
그가 영어문고판으로 들고 다니던 무라카미 류와 제임스 조이스, 일이 끝나고 함께 갔던 강남의 싱글몰트바(강남을 그때 태어나서 처음 갔었다), 홍대 인근의 멍키스나 벤츠280 같은 락카페는 여러모로 이후의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말고도 내 삶의 문화적 영역에 크고작은 영향을 미쳤던 취향들이 많다. 액션이나 SF 외의 영화는 간지러워서 보지 못했던 나를 영화관에 끌고 다니며 로맨스코미디와 인디영화를 주입시키던 여자 후배(KFC도 그녀와 처음 갔었다), 체크 무늬를 위아래로 맞춰입기 좋아하고 양복은 죄다 파크랜드, 캐주얼은 인디언이나 P.A.T 밖에 없는 줄 알고 있던 내게 폴로와 버버리 티셔츠를 선물해준 같은 사무실의 여자 선배, 외식이라고는 한식집이나 패스트푸드점 밖에 몰랐던 내게 브런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태원이라는 곳이 어디에 붙어있는 지를 처음 알려준 직장 두 해 선배 등등. 그러니까 나는 입사하고 약 3년 동안은 갑자기 문명세계에 처음 노출된 늑대소년 모오구리 같은 기분으로 주변 동료, 선후배들의 문화적 취향을 흡수해나갔던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주말에 보라색이 많이 들어간 체크무늬 반바지에 흰색 양말을 착실히 갖춘 검은 색 샌들을 신고 종로에서 영화를 본 뒤 인근 분식집에서 돈가스를 먹고 나서 집에 돌아와 거실에서 코미디 프로를 보다 잠드는 아저씨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악!!!! 글 쓰면서 문득 이미지가 떠올라서 써본 건데 너무 끔찍하다. 아악~!!!)
열심히 일을 하다가 주변을 살펴보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세상사 살아가는 필부필부가 관심 갖는 분야나 고민거리는 거기서 거기다. 관심이나 고민이 거기서 거기면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비슷비슷하다. 어떨 때 보면 너무나 하는 얘기들이 다 똑같아서 내 인생의 ‘주변사람’ 영역에 버퍼링이 걸려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조차 있다. 하지만 또 한편 공을 들여 유심히 살펴보면 어딘가에는 꼭 한 두 명, 독특하고 매력적이기까지 한 문화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취향을 지키기 위해 직장 사무실에서 놀림을 받거나 그냥 에피소드라면 에피소드인 소소한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좋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으면 가능한 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오래 사귀기 위해 공을 들인다.
동창 모임에 가면 골프, 주식, 부동산, 고지혈증에 심지어는 비아그라 얘기까지 나온다. 친구들의 모임에 의리로 나가기야 하지만 참기 힘들 때가 많다. 특히 지난 여름에는 이자까야에서 소주를 마시고 나서 영등포에 있는 한 나이트에 갔었는데 하아… 등산복을 입고 새우춤을 추고 있는 아저씨, 아줌마를 봐야 했다. (여기에서 새우춤이란 무릎을 20도 정도 굽히고 등을 둥그렇게 만든 뒤 손을 앞으로 더듬이처럼 내밀어 파닥파닥 추는 신종 늙수구레 춤을 통칭하는데 그냥 내가 그렇게 부른다.) 하지만 나는 비록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취향을 일찍 갖지는 못했어도 매력 있는 취향의 소유자를 알아보는 눈은 있는 까닭에 아직까지 아저씨 취향의 세계로 입문하는 시점만은 간신히 연기하고 있다.
내가 특히 꾸준히 지켜내는 금칙은 금, 토, 일의 연휴 같은 주말을 공들여 보내는 것이다. 금요일이면 홍대 언더그라운드 랩퍼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라임에 대한 얘기를 듣고 토요일 오전에는 휘트니스 클럽에서 한 주 간 모아놓은 칼로리를 날려버린다. 저녁 즈음에는 신촌 재즈클럽에 나간다. 가끔 운이 좋으면 버클리음대를 나왔다는 프로젝트 그룹의 공연을 들을 수도 있다. 일요일 아침에는 여의도 단골 브런치 집에서 식사를 한 후 밀린 신문을 읽거나 무라카미 류의 새로 나온 수필집을 읽으면서 일주일 계획도 세우고 졸기도 한다. 오후가 되면 강남으로 넘어가서 다양성 영화제 출품작을 보거나 단골샵에서 희귀한 작품이나 고전영화가 담긴 DVD를 빌려 호텔에서 느긋이 감상한다. (집에 DVD 플레이어가 없기 때문에) 물론 일요일 밤이 되면 개그콘서트 엔딩 음악을 BGM 삼아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보편적 루틴에서만은 나도 벗어날 수 없지만…
글/ 남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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