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결정이 만든 한반도 최고의 면수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문익점은 고려말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를 국내에 들여온 인물이다. 그는 사후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뜻에서 ‘부민후’로 추증됐으며 영의정으로도 추존됐다. 사실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같은 것도 외국에서 들여왔지만 전파한 이를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문익점은 지금까지도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의 업적은 목화씨만 들여왔던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원나라 사신 시절 기황후가 미는 덕흥군과 공민왕과의 권력 싸움에서 덕흥군 편에 섰다. 결국 공민왕의 승리로 끝나면서 귀국과 동시에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래도 왕권 싸움에서 목숨을 부지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보통 파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가면 글을 읽거나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던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실업자(?)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장인어른인 장천익을 설득해 갖고 온 목화 씨앗을 심고 재배에 들어간다.
재배술을 몰라 씨앗 10개 중 9개는 말라 죽고 하나가 겨우 살아남았다. 다행히 다음해에는 씨앗은 100여개가 됐고 수년간 재배 끝에 국내 재배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재배에 성공했어도 이를 활용해 옷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고민하던 중 원나라 출신 승려 홍원이 이들에게 씨아와 물레의 제조 기술을 전수해줬다. 마침내 초기 물레를 제작하고 목면을 짜니 백성들이 값싸게 목면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것은 혁명이었다. 그동안 귀족처럼 값비싼 비단옷은 엄두도 못 내던 백성들은 겨울에도 삼베나 모시옷밖에 입지 못했다. 하지만 보온 효과가 좋은 솜옷과 솜이불이 생겨나자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면포를 만드는 직조수공업과 상업 발전까지 촉진시켰다. 또 당시에는 가난한 이들이 결혼할 때 비단 이불을 마련하지 못해 혼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면포로 대체되면서 결혼 풍습에도 영향을 줬다.
그의 손자들 역시 조부와 함께 기술 개발에 참여했다. 손자 문래는 밤낮으로 연구해 실을 뽑는 기구를 개량하는 발명에 매진해 공을 인정받았다. 솜에서 실을 자아내는 틀을 뜻하는 ‘물레’는 그의 이름 ‘문래’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또 다른 손자 문명은 천을 짜는 법을 고안했는데 이 역시 그의 이름을 따 ‘무명’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 같은 문씨 일가의 혁혁한 공으로 문익점 본인도 다시 벼슬에 나가기도 했고 그의 형과 동생은 물론 아들과 손자 역시 과거 없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그의 일가는 최고의 면수저를 얻은 셈이다.
하지만 이 면수저는 의미가 남다르다. 사실 목화면직물은 백제 시절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말이 되도록 한반도에선 아직 대중화되지 못했다. 고려 귀족들은 문익점처럼 숱하게 원나라를 오갔지만 목화씨를 들여오지 않았다.
또 파직을 당한 사위를 믿어준 장인, 가족이 함께 시험 재배에 나서고 끊임없는 기술 개발과 전국적 보급까지 함께 만들어 온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테크 스타트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겨울을 날 수 있는 솜옷이나 의류 소재는 다양해 졌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또 다른 목화씨와 문익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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