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얼마큼 신뢰할 수 있을까. 한국 스타트업은 2016년 기준 9만 6,000개를 넘었다. 2011년보다 8% 오른 수치다. 같은 해 벤처 펀드조성액은 2012년보다 41%나 늘었다. 숫자만 뜯어보면 스타트업은 분명 성장 중이다.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우리나라는 전체 창업 중 생계형 창업 비중이 63%로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반면 기회창업은 21%로 스타트업 선진국보다 현저히 낮다. 매년 생기는 법인 가운데 해마다 20% 매출이 증가한 고성장 기업은 매년 4%씩 줄어든다. 양적 팽창이 아닌 질적 성장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사실을 숫자가 말해주고 있다.
이같은 고민을 함께 하기 위한 스타트업코리아!정책제안발표회가 지난 7월 13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렸다. 이번 발표회는 스타트업코리아!보고서를 토대로 한국 스타트업의 실태와 현황을 살펴보고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한 것.
김수호 맥킨지코리아 파트너는 한국 스타트업이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장기로 도약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4차산업혁명 시대의 건강한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려면 ▲진입 환경 ▲데이터 인프라 ▲투자자 환경 ▲창업 문화가 어우러진 선순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우버, 한국에선 창업할 수 있다 없다?=최근 1년간 누적 투자액 상위 100개 업체를 살펴보면 미국과 중국 스타트업이 전체 중 4분의 3을 차지한다. 100개 기업 가운데 한국은 없다. 국내 스타트업이 그만큼 경쟁력이 없다는 뜻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상위 100개 기업이 국내에서 사업을 한다고 가정하면 100대 기업 중 60%가 한국에서 아예 사업을 할 수 없거나 사업 조건을 바꿔야 한다. 사업을 진행하기 전 규제라는 진입장벽에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국내법에 따르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한 우버조차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저촉으로 국내에선 운수 서비스를 할 수 없다. 김 파트너는 “창업 혁신이나 새로운 시도를 펼치는 게 상대적으로 어려워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융복합·신규 사업모델 등록이 불가능한 열거주의와 오프라인 거래 환경 위주 사업 환경, 비공식 행정지도인 그림자 규제로 인한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금융과 O2O 서비스, 헬스케어 관련 서비스는 규제 환경을 대선해야 할 대표 영역으로 꼽힌다.
새로운 사업모델로 사업을 활성화하려면 개방형 규제 체제로의 전환, 규제 신설과 강화 방지를 위한 규제일몰제 의무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김 파트너는 “기존 포지티브 중심 열거주의에서 네거티브 규제 중심으로 전환하되 징벌적 손해배상제 같은 사후 억지력도 확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기존 사업자의 피해를 최소화할 사회적 안전망도 마련되어야 한다. 김 파트너는 “매사추세츠주에선 우버 서비스를 도입하는 조건으로 사업자에겐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통해 마련한 재원은 기존 택시업계 지원에 지출했다”며 기존 사업자와 신규 사업자가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4차산업혁명 시대의 원유, 데이터 제대로 활용해야=스타트업이나 학계 전문가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데이터 축적 인프라를 갖췄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선진 시장과 견주면 데이터를 활용한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 격차는 2년 가량 차이가 난다. 공공데이터 활용도 역시 OECD 50개국 중 14위다. 데이터는 있어도 정작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김 파트너는 공공데이터량 대비 질적 측면에서의 활용도가 떨어지는 탓이라고 분석한다. 공간 위치와 정부 예산, 의료 코호트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정보가 부족하고 가공에도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데이터 활용에 부익부 빈익빈이 형성되는 것도 문제다. 금융과 유통, 통신 같은 데이터는 민간이 보유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스타트업이 접근하기 어렵다.
근본 해법은 공공데이터 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데이터 수요자 중심 품질 관리 체계를 도입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공공데이터 활용이 활발한 영국을 예로 들면 활용하기 쉬운 정도에 따라 데이터를 5개 등급으로 분류하고 데이터 품질을 평가한 개방도 점수를 공개한다. 공공과 민간 협력으로 양질의 데이터가 형성된다. 이와 더불어 빅데이터 거래소를 통해 민간 데이터 거래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또 다른 원인은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인 정보 관련 규제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개인정보 관련 규제는 민간과 공공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개인정보보호법과 산업별 특정 분야에 적용되는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보호법, 의료법 등 개별법이 혼재되어 있다.
김 파트너는 “비식별 개인 정보 규제 완화를 통한 빅데이터 혁신이 필요하다”며 미국을 예로 들었다. 그는 “미국은 데이터 거래가 자유롭지만 개인 정보는 엄격하게 관리한다”면서 “미국 의료정보체계인 HIPPAA처럼 보호가 필요한 의료 정보를 정의하고 가공할 수 있는 개인 정보 범주는 나눠 관리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투자 환경 개선, 스타트업 성장↑=스타트업 성장의 한 축을 맡는 투자자 환경 개선에 대한 방향성도 언급했다. 국내 벤처 투자 시장은 국내 GDP대비 벤처캐피털 신규 투자금액 규모가 글로벌 5위를 기록할 만큼 양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정책 자금 의존도가 40% 이상. 정부 주도 시장이다. 보고서는 평균 13년 이상 걸리는 기업 공개에 편중된 회수로 투자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도 지적한다.
김 파트너는 “이를 개선하려면 능력 있는 투자자가 자유롭게 벤처캐피털을 설립하고 지금보다 더 많은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벤처캐피털간 자유 경쟁을 저해하는 높은 진입 장벽과 칸막이식 벤처투자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투자 업종 규제 완화를 통한 벤처 투자 시장 선진화, 실질적 투자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육성 환경이 마련되어 한다고 덧붙였다.
◇ 창업에 도전하는 문화 조성해야=김 파트너는 우수 인력이 창업에 도전할 수 있는 창업 문화 조성도 중요하다고 전했다. 우리나라는 기술 고등 인력과 여성 창업가 비율이 각각 13, 9%로 낮은 편이다. 김 파트너는 이를 두고 “새로운 세상에 기여하고 혁신하겠다는 창업가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창업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긍정적인 창업 문화를 확산시키려면 기업가 정신 고취를 위한 청소년 대상 체험형 교육 강화, 산학 협력 확대를 통한 예비창업자의 실질적 역량 배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도전을 장려하는 문화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김 파트너는 “스타트업이 한번에 성공하는 건 극히 어렵다”면서 “평균 2∼3번 실패 후 성공한다”고 말했다. 창업 실패에 대한 부정적 인식보다 실패를 딛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기업가 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교육을 강화하고 재도전이 가능한 창업 환경을 위해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등 창업 도전 문화를 형성하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영국 정부의 디지털 서비스 설계 원칙도 소개했다. 디지털 서비스 설계 원칙은 혁신형 사업을 주도하기 위해 영국 정부가 세운 원칙. ▲ 사용자 관점에서 설계할 것 ▲ 개입을 최소화 할 것 ▲ 데이터를 가지고 설계 할 것 ▲ 간단한 설계방식을 따르고 ▲지속적으로 시도할 것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쓸 수 있도록 설계하고 ▲ 서비스 맥락을 이해할 것 ▲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할 것 ▲ 일관성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 개방형 서비스를 설계할 것을 골자로 삼는다.
정책을 설계할 때 우리 정부가 참고할 만한 원칙은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Do less)’이다. 김 파트너는 “공식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처럼 정부는 정부만이 할 수 있는 걸 하되 이 경우에도 장기적으로 민간에 이양될 수 있게 서비스를 설계해야 한다”며 “스타트업 생태계가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면 정부가 든든한 조력자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스타트업코리아! 보고서는 아산나눔재단, 구글캠퍼스 서울, 국내 스타트업이 함께 발간한 것으로 한국 스타트업 실태와 현황,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제언을 담고 있다. 보고서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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