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마련된 규제에 현 산업을 맞추는 건 아이 옷을 다 큰 성인에게 입히려는 시도다” 2019 혁신격전지 탐색 ‘규제샌드박스’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이승익 브이리스VR 대표가 오늘날 규제 현황에 대해 언급했다. 브이리스VR은 VR 어트랙션 기기를 이동형 트럭으로 옮겨오면서 테마파크에 방문하지 않아도 놀이기구를 체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이동형 VR 어트렉션 산업을 화두로 던졌지만 그 뿐, 규제에 발이 묶여 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태로 머물렀다. 이 대표는 “관련 규정이 80년대에 머물러 있어 현재 사업을 제도에 적용할 때 모든 것이 맞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기존 규제가 혁신 기술로 신시장을 개척하려는 벤처, 스타트업 발목을 잡는다는 비판이 일자 정부 차원에서도 본격적으로 규제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규제샌드박스는 대표적인 예다. 기존 제도 내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새로운 산업 특성 상 적용 규제가 없을 때 신청 기업에 한해 2년에서 최대 4년 기존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골자로 한다. 올해 4개 부처서 시행, 산업부, 과기부가 도입을 마쳤다. 4월에는 금융 샌드박스와 지역형 샌드박스가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 시행 두달 차.. 아직까지는 합격점=앞서 규제 샌드박스를 시행한 이진수 과학기술부 인터넷제도혁신과장은 시행 두 달, 우려와는 순탄히 진행되고 있다고 평했다. 규제샌드박스 이전에도 ICT 특별법상 임시허가가 존재했지만 사실상 허울에 가까웠다. 임시허가 제도 시행 4년 간 검토 된 건 총 4건에 불과했다. 이 과장은 “규제 샌드박스 시행을 앞두고 내심 임시허가제를 답습해 현장과 괴리 있는 제도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현재까지는 취지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평했다. 규제샌드박스 도입 이후 내부 분위기 또한 전향적으로 변했다는 것이 이 과장의 설명이다.
예자선 카카오페이 이사는 지난 2월 공공기관 모바일 전자고지 활성화를 위한 ‘행정, 공공기관 모바일 전자고지’ 규제 샌드박스 선정 과정에서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의견을 보탰다. 임시허가제 체제에서 조율권한이 약했던 과거와 달리 주무부처 합의가 원활하게 이뤄지면서 의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 이 과장은 그럼에도 아직 100% 규제 개혁을 수용하는 분위기는 아니”라며 “(어떤 고충이 있는지) 들어줄 여지는 있지만 완전히 규제를 풀어주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만들어졌지만 쉽사리 규제를 풀어줄 수 없는 건 기존 규제마다 존재 이유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 대입해보면 해묵은 규제가 산업 발전의 걸림돌이 되는 꼴이지만 기존 규제도 태동 당시 나름의 당위성을 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별로 규제가 산재해 있는 것도 걸림돌이다. 이 과장은 “보물찾기 식으로 각 부처 고시를 살피지만 정확하게 규제 내역을 연결하고 파악해내기가 어렵다”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규제들을 찾아보고 부처 간 협의를 이끄는게 어렵다”고 말했다.
◇규제 샌드박스.. 부처간 협의는 필수=김정욱 KDI “규제연구센터장은 규제 샌드박스가 4개 부처에서 시행되거나 시행 예정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운영될지는 아직 모른다”며 “블랙박스가 될 지 샌드박스가 될 지 기로에 서있다”고 짚었다. 성공적인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정부, 산업계 부처간 손을 잡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승익 브이리스VR 대표도 “이동형 VR 트럭의 경우 과기부에서 앞장서 규제샌드박스를 승인했지만 관련 부처인 국토부나 문체부와 마주하면 다시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반복된다”며 “관계부처 간 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자선 카카오페이 이사도 “샌드박스 실행이 각 부처별로 진행된다기보다 한데 어우러지며 활성화 할 수 있길 바란다”며 의견을 보탰다. 아울러 예 이사는 주무부에 강력한 조정권한을 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부처별 혁신부서 검증과 규제 샌드박스 책임자를 외부 위원회를 통해 선발하면서 내부 조직의 선택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규제 개선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게 그의 입장이다.
이와 함께 관련 부처에서도 규제 샌드박스를 계속해서 추진해나갈 수 있는 전문 인력이 확보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 대표는 “관련 분야를 직접 체험해보지 않은 심사 위원이 평가에 참여하면서 산업 역기능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 같이 주장했다. 예컨대 VR트럭이 활성화되면 그로 인해 청소년 관람불가 영상이나 사행성 영상이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게 심사 평가 단계에서 나온 우려였다. 이 대표는 당시 질문을 듣고 숨이 턱 막혔다고 기억하며 “상식적으로 공공장소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영상을 볼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심의 이후에는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입법화로 연결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김 센터장은 “규제샌드박스 적용 기업이라도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며 “규제샌드박스 시행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하고 설령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규제 샌드박스가 시행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규제 샌드박스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정부, 산업계 전문가는 규제 샌드박스가 신사업을 옭아맸던 규제를 끊어내는 단초가 될 것이라 기대하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진수 과학기술부 인터넷제도혁신과장은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규제 샌드박스 기간 동안 여러가지 검증을 통해 궁극적으로 기존 제도와 규제를 바꿔나가야 한다”며 “규제 샌드박스 시행 기간 동안 관계부처와 협의해서 규제를 완전히 없애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부처와 산업계 뿐 아니라 일반 소비자의 관심도 필요하다. 다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산업이라면 필연적으로 갈등을 야기한다. 관계 부처도 새로운 산업을 받아들일지 판단하는데 고민이 깊어진다. 이 과장은 “현재 규제샌드박스 도입은 몸풀기 단계”라며 “앞으로 본격적으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힘과 기술에 사회 전체가 힘을 실어줘야 할 지 결정하는데 소비자도 힘을 보태야 한다는 뜻이다.
유병준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규제 관련 협의체를 보면 결국 기득권 문제로 귀결된다”며 “새롭게 시장에 진출하는 신진사업자와 이미 기존 시장 사업자와의 싸움이다. 진입 장벽을 깨야 새로운 사업이 나오고 경쟁 속에서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가 나온다. 우리나라 경쟁을 이끌어나갈 산업을 잃지 않도록 관심과 지지를 부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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