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사전동의권, 소송으로 가면 이제는 무효?

 

“대표님! 이런 계약에 사인하실 바에는, 차라리 대출을 받으시는 게 낫겠습니다.”

얼마전 필자가 투자계약(seed 단계) 자문 중 실제로 드렸던 조언이다. 의뢰인은 IT 스타트업이었는데, 훌륭한 창업 멤버들로 장래가 매우 유망한 곳이었다. 그런데 투자자가 보낸 계약서에는 말도 안 되는 독소조항들이 가득했다. 곳곳에 교묘하게 숨겨진 독소조항들을 풀어서 설명해 주니, 그때서야 대표님은 아연실색하였다. 결국 계약 협상이 원만하지 않아 해당 투자는 무산되었지만, 다른 곳에서 훨씬 합리적인 조건으로 투자가 이루어졌다.

해당 회사는 현재 단기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이미 후속투자 준비 중이다. 만약 초기의 불리한 계약에 사인했다면, 후속 투자논의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내가 왜 그때 그런 계약서에 사인했을까?”

투자계약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있어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다. 많은 창업자들이 법률 분야가 낯설다. 별다른 법률검토 없이 계약에 도장을 찍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초기 시드투자~시리즈 A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시점에는 회사가 보통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을’의 입장에서 말도 안되는 불리한 투자계약에 협상조차 하지 못한다.

일단 그렇게 한번 체결하면 다음 단계 투자자들은, “최소한 이전 단계의 투자계약 수준은 보장해야 한다”며 더 불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때쯤 되면 창업자들도 아차 싶지만(보통 이쯤에서 별다른 협상이나 수정 없이 사인한 것을 후회하기 마련이다) 보통 후속 투자의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또다시 어쩔 수 없이 날인한다. 이렇게 투자계약의 악순환이 몇 번 반복되고, 엑시트(exit)나 기업공개가 눈앞에 닥치면 그제서야 후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내가 왜 그 때 그런 계약서에 날인했을까?” 더 많은 권리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자기 회사임에도 이미 너무 많이 뺏겨 버린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경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투자계약의 주요 이슈들을 짚어본다. 투자계약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실질적 의미의 직접 자본투자(시드투자, 시리즈 A~C)인 경우도 있고, 양자간 시너지를 위한 사실상의 지분 스왑인 경우도 있다. 본고에서는 일단 전자에 한정하여 검토한다.

먼저 (1) 투자계약 위반시의 일반적 효과(손해배상)을 살펴 본다. 이후 (2) 최근 사전동의권 조항과 위반시의 손해배상 자체를 무효로 판단한 최신 판례를 분석하여 투자계약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한다.

 

투자계약을 위반한다면?

투자계약을 위반하면 어떻게 될까? 보통 투자계약 해제권과 함께, 회사 및 주요주주에게 손해배상을 하도록 약정한다. 구체적으로는 (i) 회사에게 투자주식을 도로 사가도록 하는 등의 방식으로 최소 투자금 이상의 금액을 반환하도록 하거나(보통 지연이자나 배액배상 등 추가 금액이 붙음), (ii) 후술하는 ‘위약벌’ 형태로 위반행위마다 정해진 금액을 배상하도록 한다.

위 (i)은 일종의 위약금(손해배상액의 예정)이다. 민사소송에서는 손해배상시 이를 청구하는 사람이 ‘손해’의 발생과 범위를 입증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계약 위반시 손해는 이 금액으로 보자”라고 의제하는 조항을 두는 것이다(소위 말하는 ‘위약금’). 위약금의 비근한 예시를 들자면, 부동산 계약시 계약금을 넣도록 하고, 위반시 배액을 배상하게 하는 조항이 전형적인 위약금 조항 중 하나이다.

스타트업 투자계약서에서 보통 손해배상액의 예정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술하였듯 주식매수청구 형태로 회사에게 강제로 투자주식을 사도록 하고, 투자금 이상의 금액을 반환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계약 위반의 형태에 따라 달리 정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주요주주의 제3자 주식처분금지의무 위반시, 해당 주식처분으로 얻은 매수대금 이상의 금액을 지급하도록 약정하기도 한다.

실무상 위와 같은 투자계약 위반이 자주 다투어진 것은 주로 투자자의 사전동의권 문제였다. 사전동의권은 스타트업 투자계약의 단골조항이다. 일정 규모 이상 차입이나 비용 사용, 주요 멤버들의 급여 증가 등 재무적 사항이 일반적이며, 운영과 관련된 여러 회사의 의사결정에까지 동의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많다. 사전 동의조항과 함께 주요 의사결정 후에 사후 보고조항을 약정하기도 한다. 보통 사후보고나, (전술한) 제3자 처분은 회사나 주요주주가 일부러 위반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되는 경우가 적다.

다만, 신속한 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에 있어 일일이 주주 사전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특히, 해당 투자자가 기관투자자인 경우 결재절차가 대체 언제 날지도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실무상 “이런 것까지 동의를 받아야 하느냐, 이걸 회사가 꼭 지켜야 하느냐”는 원성이 높은 조항이기도 하였다. 투자자의 투자비율이 높은 경우, 경영권 다툼이 생길 때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는 조항이기도 하다.

 

‘위약벌’ 표현이 나오면 일단 경계해야

한편 계약서에 ‘위약벌’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주의하여야 한다. ‘위약금(손해배상액의 예정)’과 ‘위약벌’은 법률상 다른 개념이다. ‘위약벌’은 계약 위반행위 자체에 대한 벌금으로, 손해배상과는 별도로 인정되는 징벌적 약정이다. 즉 원칙적으로 위반시마다 부과된다. 또한 소송시 감액이 가능한 위약금과 달리 원칙적으로 감액되지 않는다.

투자자 측(특히 VC나 펀드)에서는 본인들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일단 위약벌을 넣어 놓고 보는 경우가 많다. 법을 잘 모르는 창업자들은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위반하지 않으면 되지 않냐’는 투자자의 감언(?)에 속아 별 생각 없이 날인하고 이후에 크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해당 투자자가 엑싯하지 않는 한 온갖 측면에서 회사의 손발을 묶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실무상 위약벌은 그 특성상 ‘위약벌’이라는 명칭을 써야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조금만 유의하면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만약 계약 상대방이 손해배상과 별개로 위약벌까지 넣어 두었으면, 이중으로 배상할 수 있음을 유의하고 체결해야 한다.

반대로 계약서 내에 명시적인 손해배상 예정 조항은 없이 위약벌 조항만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계약 위반시 위약벌(정해진 금액)만 배상해도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계약서에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적으로 없더라도, 민법에 의하여 손해배상은 (손해만 있다면) 늘 인정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 판례 ◆ 투자자 사전동의권, 소송으로 가면 이제는 무효?

그런데 최근 주목할 만한 판례가 나왔다. 법원이 이러한 사전동의권 조항을 무효로 판단한 것이다. 지난 10월 서울고등법원 민사제16부는 기업이 신주인수인에게 ‘회사의 중요 경영사항’에 관한 사전동의권을 부여하는 약정은 ‘주주평등 원칙’에 반해 무효라고 판단했다(서울고등법원 2021. 10. 18. 선고 2020나2049059 판결). 위 사건에서 대상회사(B사)는 2016. 12.경 자금사정 악화로 20억 원 규모의 전환상환우선주(RCPS)를 신주로 발행했고, 투자자(A사)는 투자자금 회수를 위해 향후 B사가 신주 발행시 사전 서면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특약하였다. 해당 약정을 위반하면 투자금(20억 원)을 조기상환하고, 위 금액 상당의 위약벌도 이중으로 부담하도록 했다. 그러나 B사는 2018.경 A사의 사전 서면동의 없이 신주를 발행하였고, A사는 B사를 상대로 위 투자금의 조기상환금 20억 원과 위약벌 20억 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해당 사건에서 신주인수인(투자자인 A사)가 주식의 원래적 권리를 넘어, ‘신주발행에 대한 사전동의권’ 등의 추가적 경영·재산상 권리를 취득하였는데, 이러한 약정은 B사의 다른 주주들에게 인정되지 않는 ‘우월한 권리’를 부여하여 회사 경영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고, 약정 위반시 (상법상 인정되는) ‘배당가능 이익’ 존부와 관련 없이 언제든지 출자금 초과 금액을 반환받을 수 있도록 하여 주주평등의 원칙에 반하므로 무효라고 판단했다.

위 판례의 의미를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어떤 주주에게만 다른 주주들에 비하여 특정 주주에게만 우월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주주평등 원칙에 반한다(*참고로 주주평등 원칙은 회사법 법리상 매우 중요한 대원칙임).
  • 주주들은 투하자본의 회수를 불평등하게 보장받을 수 없다. 즉 특정 주주에게만 회사에서 투하자본(주식가치 상당금액)을 지급하는 것은 금지된다.
  • 그런데 특정 주주에게만 우월한 권한을 부여하고, 이를 강제하기 위해 강력한 제재(위약벌 등)를 하는 것은 사실상 ‘황제주’를 만들어 법이 허용하지 않는 형태의 종류주식을 발행하는 것이다. 또한, 상법상 배당가능이익이 남아있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회사의 현금유출(투하자본 회수)를 일으킨다.
  • 이는 주주들 사이에서 심각한 불공평을 초래하고, 적절한 공시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주식의 거래안전도 해한다.
  • 따라서 이러한 조항은 무효이며, 이를 강제하는 제재조항도 무효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위 판결은 제1심의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뒤집고 원고(투자사) 전부패소 판결을 선고하였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것은 아니므로, 아직 완전히 확립된 법리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항소심 법원의 판단이라는 측면에서 무게감이 있다. 향후 투자계약 실무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투자계약상 다른 조항들도 소송시 무효 될 수도

위 판례에서 재판부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장치로 법이 인정하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일부 주주에게만 특수한 권한을 부여하는 종류주식 발행이 허용되지 않는 현행법 체계 하에서 특정 투자자에게만 별개의 약정으로 우월한 권한을 부여하고, 위반시 강력한 제재를 하여 이행강제를 하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명시하였다.

위 사건에서는 사전동의권만 무효로 판단되었지만, 위 재판부의 취지에 따르면 다른 주주들에 비하여 특정 주주에게만 우월한 권한을 부여하는 투자계약서들의 조항들 역시 추후에도 무효로 판단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보인다.

 

마치며

투자계약의 목적은 투자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즉 ‘투자자는 자금을 댈 테니, 회사는 본업에 집중해서 회사 가치를 높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몇 FI의 투자계약서 초안을 보면 황당할 때가 많다. 특히 최초 단계인 시드(seed) 투자 때에는 고작 1~2억원 정도를 투자하면서, 말도 안 되는 독소조항들을 잔뜩 넣어 둔다. 아마 되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인 듯 하다. 그러나 이는 후속투자시에도 지속적으로 회사의 권리를 제한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주요주주들이 최선을 다해 회사의 가치를 발전시키고 싶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투자계약 관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탈출하고 싶어하는 대표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속 가능한 기업활동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투자란 원래 본질적으로 리스크를 져야 하는 것인데, 그 리스크를 낮추기 위하겠다고 온갖 말도 안되는 조항을 넣어 만든 투자계약이 오히려 투자자들의 더 높은 가치 실현도 저해하는 것이다.

정책적으로는 향후 중소기업벤처부 등 유관부서에서 초기 투자단계 또는 소규모 투자금액이 적용되는 거래에서 표준 투자계약서를 권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초기 투자단계에서의 양자의 부담도 덜어지고, 장기적으로 보아서도 스타트업들의 가치 상승에 더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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