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두려운 것이다. 소통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특히나 소셜미디어상에서 기업에게 “소통하라!” 주문하는 것은 기업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감사하며 받아들이라는 강요나 다름없다.
소통을 시도해 본 개인이나 기업은 그 소통의 과정이 얼마나 두렵고 힘든지 경험한다. 소통이라는 과정에서 개인이나 기업은 나와 관계된 이해관계자들의 ‘마음을 직접 들어야 하는 극한 고통’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이전 개인이나 기업은 이해관계자들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많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직접 들을 수 있는 미디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개인이나 기업에게 불만을 가진 이해관계자들 일부는 아주 가끔 다가와 직접 불만을 이야기하거나, 문서를 보내 컴플레인 하거나, 전화를 걸어 불만을 제기 하곤 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전체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숫자의 극히 일부였을 뿐이다. 이외 대부분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스스로 간주하는 이유가 여기에 기반했다.
기업 커뮤니케이션이나 PR의 경우에도 그 발아 시점에서 판단하건대, 이전의 이해관계자들의 모습으로 그들을 그대로 정의하고,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에 중심을 두었었다.
그러나, 현재의 소셜미디어 환경에서 개인이나 기업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에 대한 대다수의 불평들과 실망들을 ‘실시간으로 직접’ 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무균질 상태에서만 서식하던 CEO나 임원들도 그 이해관계자들의 머릿속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거다.
이는 마치 다음과 같은 상황과도 유사한 고통을 준다. [영화 What Women Want를 기억하라]
* 항상 성스러운 설교로 유명한 목사님은 돌아서 자신을 멍청하다 험담하는 신도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게 되었다.
* 항상 스스로 존경 받고 있다 생각했던 교수님은 자신에 대해 변태라는 여학생들의 비아냥을 엿들을 수 있게 되었다.
* 항상 리더십이 있다 자만했던 CEO는 자신이 개념 없고 게으르다는 직원들의 불만을 엿들을 수 있게 되었다.
* 항상 아내는 자신에게 순종하고 있다 생각하던 남편은 아내가 나의 남편은 구제불능이라는 옆집 아줌마와의 하소연을 엿듣게 되었다.
* 항상 차분하고 예의 바른 며느리가 돌아서 지껄이는 욕설들을 시아버지는 그대로 듣게 되었다.
* 평생 죽마고우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루저라 이야기 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개인 미디어이며, 직접적 미디어인 소셜미디어를 통한 소통 과정은 개인이나 기업에게 이런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소통은 기업에게 이상향이라기 보다는 지옥과 같은 고통이자 두려움이다.
모 라디오 방송 사연처럼, 평소 시부모에게 사랑 받던 얌전한 며느리가 매달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부치는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아들 집에 들러 우연히 며느리 가계부를 들쳐보니 ‘시골 년에게 돈 부치는 날 ‘이라고 메모를 해 놓은 것을 보고 어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어떤 개그맨의 할머니는 돌아가신 이후 남겨 놓으신 일기장에서 매일 자신의 며느리를 ‘썩을 년’ ‘나쁜 년’이라고 마무리 지었었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소셜미디어는 이전에는 이랬던 사후 소통도 실시간으로 진행하고, 직접적으로 전달한다는 게 특징이다. 기업은 이런 직접적 커뮤니케이션에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또한 간접적 대중 미디어를 통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선별적 일방적 소통에서도 성공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이런 급격한 업그레이드에는 헉헉댈 수 밖에 없다.
최근 기업들이 너도 나도 ‘소통’이라는 가치를 마치 이상향인 것처럼 내세우는데…진정 현재와 같은 미디어 환경에서 소통을 지향하려면 우선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두려움이나 고통에서 자유로울 정도로 그것은 완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업들은 소통을 통한 고통을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한다.
소통은 진정 몰라서 무섭지 않은 거다.
글 : 정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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